2014/05/05 23:16

01. 오뎅집에서 99개의 대화, 그리고 사색



*) 픽션이거나, 논픽션이거나, 아니면 실제에 상상을 더했거나.

  


나는 오뎅집으로 들어갔다.

나무 간판에서 젊은 주인의 패기어린 냄새가 묻어나는 그런 곳이었다.

예상대로 건장한 젊은 남자가 가게 안을 지키고 있었다.

하얀 두건을 머리에 두른 그는 큰 소리로 인사했다.

나는 혼자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가 오뎅바가 있는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

초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.

 

따뜻한 정종 한잔 주세요.


.

 

색색깔로 다양한 오뎅이 눈에 띄였다. 그 중 붉은 빛이 나는 오뎅을 하나 꺼내 물었다. 게살 맛이 나는 오뎅이었다

두입째 베어물 생각은 들지 않았다. 맛이 문제가 아니었다

오뎅은 먹기 좋게 익었고 맛있지만 나는 어딘가 정신을 좀 빼놓고 있었다

사실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다

여자 혼자 오뎅바라니

드라마에서나 능청스럽게 해낼 법한 일이지.

그렇게 생각했었는데. 나는 좀 넋이 나가, 에잇 까지꺼. 라는 생각이 들어,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곳 문을 열어 제꼈다.


오늘따라 생각이 많았다.

머리가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딱히 남의 시선을 신경쓸 만한 그런 여유가 없었다

다행히 내가 의식해야 할 다른 손님은 한명도 없었고

내가 여기서 혼자 궁상 떨고 있는 사이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도, 아마 나를 혼자 자주 오는 단골 손님쯤으로 여길 것 같았다.


나는 정종을 시켜 놓고 한입 베어먹은 오뎅을 손에 들고는 

오뎅 국물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에 시선을 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

표정 관리를 할 정도의 에너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나는 무장해제 상태였다


누가 툭 찌르면 그냥 이 생각들이 내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올 것 같았다

나는 언짢았고 혼란스러웠고 불만스러웠다.

그리고 젊고 호기로운 주인은 정종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나를 툭.

 


무슨 일 있으셨어요? 표정이.

 


나는 와르르.

 


왜 다른 사람들한텐 쉬운 게 저한테는 그렇게 어려울까요.



라고 말해버렸다.

 


글쎄요. 뭐 연애 문제 그런거에요?

 

아니라고는 말 못하겠고. 그렇다고 연애를 한 것도 아니니까 맞다고도 못하겠고.

예전에 저 좋다고 혼자 오버하다가, 저한테 막판에 엄청 상처 준 친구가 있거든요.

다른 친구들은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. 이젠 서로 얼굴봐도 되지 않겠냐고 그러는데.

저는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운건지.

 

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보죠. 근데 그 친구가 어쨌길래요?

 

......


...아무튼. 다른 친구들이 당신을 이해 못해줘요?

 

4년 전 일이니까요. 제가 아직까지도 의식하고 있는게 이해가 안 되나봐요.

 

이야. 상처가 컸나보네. 혹시.. 실은 그 친구 좋아했어요?

 


이 사람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

그러려면 이제는 이 사람을 이해시켜야 했다.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.

 


문제는 그게 아니라, 내가 쉽지 않은건, 그렇게 상처받고 또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었어요

누구와도 관계를 진전시킬 수 없었었어요

그런데 그 애는 다른 사람 만 나서 연애하면서 잘 살고 있었더라고요

왜 그럴까요. 저한테는 참 쉽지 않은 일인 데.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봐요.

 


나는 정종을 한 모금 마셨다. 따뜻해서 잔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.

 


나도 잘 살고 싶은데. 그게 잘 안돼요.

 


주인은 자신이 쓰는 플라스틱 컵을 가지고 와 홀짝이며 내 앞에 섰다.

나는 그 사이에 오뎅을 한 입 더 먹고 정종도 한모금 더 마셨다.

 


저도 아직 많이 산건 아니라, 뭐라고 말하긴 어려운데요

지금까지는 쉽지 않았지만 오늘 그거 한잔 마시는 사이에 다 잊고 가세요

여기 나가면서부터는 다 쉬워지게.

 


나는 웃어보였다. 감사의 뜻이었다. 위로해줘서 고마워요.


 

그런데 잘 사는게 뭐겠어요? 꼭 그 사람, 그 상처 다 잊어야 잘 사는거에요?



남자가 물었다.


 

목에 걸려 있으니까요. 소화 안되는 음식처럼.



내가 대답했다.


 

우와. 비유가 와닿네. 그럼 다른 맛있는 음식 많이 먹어서 저 밑으로 눌러버리세요. 똥 돼서 나오게

많이 경험하고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좋은 것들 보면서 좋아하는 것들 다 하면서

그러다보면 어느새 저 밑에 내려가 있지 않겠어요? 형체도 알 수 없이요

언제 먹었는지, 어쩌다 체했는지 기억나지도 않게요.

 


. 순간 콧등이 따끔했다. 나 진짜로 위로받았다.

그래. 위로는 이런거지. 받는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위로. 나는 감탄하며 말없이 조금 웃었다.


투박한 손과 힘있는 말투가 어쩐지 세상 모든 일에 무대포로 부딪쳐 보는,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단순한 사람 같은 인상이었는데 이 남자 의외로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생각을 했나보다

오뎅집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이 남자는 그저 호기로워 보이는 젊은 사장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. 

아니 많이 달랐다.

그리고 순식간에 이 오뎅집도, 이빨 자국이 난 먹다만 오뎅도, 투박한 사케잔도 모두 영롱해 보였다.

 


여기 자주 올께요.


진심이었다.

 

그래주면 감사하죠.

 

근데 저같이 문제 많은 손님들 자주 오나봐요? 상담 실력 좋으신데요.

 

어제 오픈했어요.

 

아 그래요?

 

주인은 쑥쓰러워하며 플라스틱 컵 안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.

그냥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컵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시드비셔스의 사진과 텍스트로 콜라주가 된 그래픽이었다

어허. 이 사람 취향 괜찮은데? 시드비셔스라니.


그때 가게 밖으로 달음질 치는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.

그리고 쏴아- 하는 소리. 비였다.

 

비가 내렸다. 비가 오고, 마음은 가볍고, 따뜻한 정종이 반이나 남은 잔과, 하얗고 맛있는 연기

그리고 사람 냄새, 아담한 이 공간, 그리고 시드비셔스.

 


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, 완벽한 순간이었다.

 




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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